수기① 의사환자의 성탄카드

서울아산병원 간호부 ‘한마음 한뜻 페스티벌’ 참관기

20년 동안 몰라줘 미안해요! 고마워요!
수기① 의사환자의 성탄카드

특실에 입원한 환자를 인계받고 난 후 카트를 끌고 가는 나의 발걸음은 마치 비에 젖은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 환자는 외과 의사로 누구보다 생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의사로서 자부심도 강했던 그는 자신의 상태를 직접 살펴보길 원했고, 물품도 자신에게 익숙한 외과물품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간호사들을 곤란하게 했다.

눈으로 보고 점검해야 직성이 풀리는 간호사에게 배액관의 상태를 보여주지 않고 직접 배액관의 상태를 본 후 설명했고, 그런 환자의 고집스러운 행동에 어쩔 수 없이 매번 배액관의 상태를 물어보며 확인해야만 했다.

호출 벨이 울려 열 일 젖혀두고 뛰어가면 막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보온병에 온수를 받아오는 일이나 침상 높이를 조절하는 일이었다.

치료에 관한 사항은 오직 담당 교수님과 소통했다. ‘나는 그분에게 의료진이 아니라 그저 개인 비서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당장 병실로 와달라는 벨이 울렸고, 늘 그래왔듯 무거운 마음으로 특실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병실 바닥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두 동강 난 휴대폰과 탁상 위에 놓여 있어야 할 스탠드, 충전기 등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정적을 깬 건 환자의 울음소리였다. 늘 침착한 표정과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환자였기에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무슨 일이세요? 왜 이렇게 울고 계세요?”

환자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두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간호사님, 나 곧 죽을 것 같아.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였다. 환자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환자였는데 컴컴하고 텅 빈 병실에서 혼자 숨죽여 울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먹먹함이 밀려왔다.

쉽게 말을 잊지 못하고 환자를 바라보다 내 손을 차가운 환자의 손 위에 포개어 잡아주었다. 환자는 그렇게 내 손을 꼭 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환자는 조금씩 달라졌다. 평소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환자는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고, 담당 간호사에게 배액관 확인을 맡기는 것은 물론 외과병동에서 쓰는 물품으로 교체해 달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노력하는 환자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고 싶었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여 간호사, 전공의들과 함께 감사카드를 작성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환자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간호사님, 사실 나는 20년 넘게 외과의사로 근무하면서 단 한 번도 간호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의사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간호사가 환자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네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 해 겨울 어느 날 환자의 병세가 갑자기 나빠졌다. 다음날 오후 환자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병실 문을 들어서자 병상 위에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이 보였다. 환자 곁에 있던 보호자가 다가왔다.

“동생이 이 병동을 정말 좋아했어요. 잊지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보호자의 손에는 환자가 우리에게 미처 전해주지 못한 성탄카드가 있었다.

입사 초기 나는 환자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힘든 일상 속에 초심은 점점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다.

환자와 함께 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나의 말과 행동이 그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봤다.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어루만지는 것 또한 간호사의 역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환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한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의 고귀한 인생 가운데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며 그들과의 만남을 언제나 소중하게 여기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또다시 다짐해 본다.

간호5팀 72병동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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