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사를 만난 순간 - 198호에 이어서...

지난 호(198호)에 나는 ‘내가 감사를 만난 순간’에서 딱 감사를 만난 순간까지만 썼다. 꼭지 제목에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감사를 만나고 난 뒤 내가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막상 글로 쓰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현재의 내 모습에 감사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도 가늠이 어려웠고, 그게 진짜 감사 때문인지 다른 연유인지, 그것도 분석 불가였다. 그래서 일단 보류해두었는데, 궁금하다는 피드백이 있어 전례에 없음에도 ‘내가 감사를 만난 순간2’를 쓰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글들을 보면, 감사 실천 방법과 달라진 모습에 대한 진술들이 엇비슷했다. 매일 5감사를 쓰고, 중요한 날에 100감사를 쓰고, 큰 결심의 기로에 섰을 때 100일 100감사를 쓰고, 그러면서 변한 자신의 인성에 대한 고백들이었다. 그것이 하나같이 좋아 주변에 적극 권유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맺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감사 실천과 약간은 거리가 있다. 그래서 사실 밝히기를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놔 보겠다.

감사나눔신문 기자로 합류하면서 내가 쓰거나 본 ‘감사합니다’ 단어 숫자는 어느 해변가 모래알처럼 많았다. 격주 신문이지만 마감을 하고 나면 곧 돌아오는 시스템에 나만의 감사를 쓸 시간은 많지 않았다. 물론 아침에 잠깐 쓰면 된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나는 그전부터 해오던 나만의 글쓰기가 있었다. 읽었던 책 가운데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책의 중요 문구를 베껴 쓰고, 그것을 보면서 나의 생각을 쓰는 것이었다. 글쓰기 강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들인 이 버릇을 그만두고 감사 쓰기로 하루를 연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글쓰기로 생존을 도모하는 작가이지, 감사 에너지 축적으로 달라진 모습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감사나눔신문 기자인데 최소한의 감사 쓰기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무감이 이는 순간 어김없이 마감이 찾아오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쓰고 보아야 했다. 자주 보아야 예쁘다고 하지만 자주 보니 무감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글쓰기에 변화를 가져 오려고 시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내 안에 시나브로 축적된 감사 에너지를 알게 되었다. 시를 베껴 쓰고, 나의 시를 쓰고, 멘트를 달면서 마무리로 꼭 ‘감사합니다’를 썼다. 또 하나, 책을 베껴 쓰는 중간중간,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면 ‘감사합니다’를 넣곤 했다.(글쓰기 이외에 대화에서도 ‘감사합니다’를 자주 끼워 넣는 나를 보며 깜짝 놀라곤 한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5감사, 50감사, 100감사도 여러 번 썼고, 업무상 감사도 많이 썼다. 그것들이 나의 인성을 부드럽게 했는지, 부정적인 면들을 많이 줄였는지, 거기에 대한 명확한 진술은 하지 못하겠다. 

다만, 감사를 말하고 쓰기 전보다 분명 화를 내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긍정적 사고도 많이 하고 있다. 우울 모드의 팍팍했던 삶이 풍부해졌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감사라는 것도 인지하였다. 
그것이 온전히 내 안에 깃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이대로 쭉 가보자. 그게 현재 주어진 길이다.                   

김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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