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CO와 박태준 회장에게 감사를 (2)

일본의 군사적 목적에 따라 한반도 북부지역에 세운 근대적 제철소에는 일본인 제철 기술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이 패망하자 한꺼번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광복 직후 분단된 남한엔 철강산업의 공동화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그 후 20년간 세 가지 문제를 고착시켰다. 철강산업 분야의 민족자본 전무, 철강산업의 북한지역 편중에 따른 남한 제철산업의 빈약, 철강 기술 인력의 절대적 부족.

1965년의 한국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종합제철소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재래적 농업국가’를 ‘근대적 산업국가’로 탈바꿈하겠다는 공약은 허황할 뿐이었다. 6·25전쟁의 기억이 고스란히 반공으로 뭉친 남한에서 ‘눈앞의 적’이 월등한 철강생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보 불안의 요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방 후 20년 동안 남한 정권이 철강산업에 무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0월부터 연산 1만 톤 규모의 선철 생산을 목표로 삼화제철 삼척공장 20톤급 소형 용광로 8기,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 50톤급 평로 2기 제강설비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해 미완에 그쳤으며, 돌아가지 않는 제철공장마저 전화를 입었다. 이런 와중에서 정부는 1952년 ‘철강업 재건계획’을 입안해 삼화제철 삼척공장 복구공사를 시작했고, 전쟁 고철을 재생할 방안을 강구하려고 1953년 6월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을 모체로 한 대한중공업공사를 발족했다. 휴전협정을 조인한 뒤에도 제철소를 건설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954년 9월 대한중공업공사 주관으로 5만 톤 규모 평로 제강공사 국제입찰이 있었다. 미국, 스위스, 독일의 전문업체가 참여했다. 낙찰은 독일 데마그가 받았다. 이어진 압연공장 건설도 데마그가 차지했다. 빈곤한 우리 정부가 외환보유고에서 530만 달러나 투입한 ‘대형프로젝트’였는데, 아이젠버그라는 유대인 괴상의 손이 깊숙이 들어간 일이었다. 그로부터 계절이 수십 차례 바뀐 뒤에는 영일만에서 박태준과 승부를 하게 되는 ‘큰손 국제 로비스트’ 아이젠버그…….
1956년 8월에는 ‘철강개발5개년계획’을 입안하여 상공부가 1957년 국제협력기금(ICA)과 접촉했다. ICA 자금 300만 달러로 묵호에 연산 5만 톤 규모의 선철공장을 1962년까지 완공하기로 하고, 1958년에 ICA 자금 3천만 달러와 내자 248억 원을 들여 1965년까지 연산 선철 20만톤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양양에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두 번의 희망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규모 제철소, 건설 계획이었지만 외국 투자기관은 한국 제철산업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형 종합제철소 건설을 꿈꿀 수 있었겠는가.

 

5감사

1. 대한민국을 위해 ‘근대적 산업국가’라는 인식을 가졌던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2. 전쟁 고철을 재생할 방안을 강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산업국가 기틀을 위해 ‘철강개발5개년계획’을 입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 소규모 제철소 건설 계획이 무산되어 꿈을 잃을 수 있었는데도 종합제철소 꿈을 꾸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5. 당장 현실 가능성이 없어도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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