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숙 (사)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의 100감사

 

 

1.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께 감사합니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연해주로 이주한 후 러시아의 선장을 만나 그 당시 한인최초로 6년간 배를 타고 세계를 두 번이나 돌면서 글로벌청년으로 성장한 후부터 유창한 러시아어로 연해주 한인들의 대변자였으며 한인최초로 러시아 행정구역의 얀치혜 군수가 되어 한인마을마다 32개의 학교를 세우고 군납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뤘습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만들어 안중근, 우영장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를 배후에서 직접 지원했습니다. 대동공보사장으로 안중근 의거를 특집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이후 권업회 총재와 전로한족중앙회 명예회장과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의 가문은 독립운동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이회영가문과 함께 올해 3.1문화재단에서 공동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우리가 꼭 기리고 더 많이 선양해야 할 독립운동가이자 기업가, 교육가, 언론가, 노블레스의 전형인 최재형 선생께 감사합니다.

 

2. 국내 국외 최초의 항일독립단체 동의회 <同義會>에 감사합니다.

낯선 땅 러시아에서 국내외 최초로 만들어진 항일독립단체 동의회<同義會>.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인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 바로 안중근의사입니다. 안중근의사는 뤼순의 일본법정에서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니 만국공법에 의해 포로대우로 재판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의 요구를 묵살하고 안중근 의사가 개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미워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며 일반 살인죄를 적용해 불법재판으로 안중근을 사형시켰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최재형 선생이 총장으로 있던 <동의회>의 평의원이었던 안중근의사와 최재형의 만남으로 가능했고 동의회는 이들이 항일운동을 하기 위한 주요한 독립단체였습니다.

 

3.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시고 일본의 대륙침략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사님께 감사합니다.

 

‘대 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치시고 한.중.일 삼국이 평화협정을 맺어 영구평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평화의 사도이십니다. 안중근의사가 뤼순에서 일본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술한 사상집이 바로 <동양평화론>입니다.

 

4.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했던 <헤이그밀사> 이상설 선생, 이준 열사, 이위종 선생께 감사합니다.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이준과 이상설은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헤이그로 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헤이그 만국박람회> 장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세 밀사는 만국박람회에 가서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려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위종의 유창한 불어로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5. <대한국민의회>에 감사합니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이 세운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에 감사합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은 문창범이었고 외교부장은 최재형이었습니다.

 

6. < 2.8 독립선언>을 한 일본유학생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에 감사합니다.

최팔용, 이종근, 김도연, 송계백, 이광수, 최근우, 김철수, 김상덕, 백관수, 서춘,

윤창석까지 이분들로 조직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께 감사합니다.

 

7.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에 33인에 감사합니다.

1. 손병희 (천도교) : 천도교측 수장.

2. 권동진 (천도교) :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 권병덕 (천도교) :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4. 나용환 (천도교) :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5. 나인협 (천도교) :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6. 김완규 (천도교) : 한일합방 후 천도교 입문.

7, 양한묵 (천도교) :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8. 길선주 (기독교) : 한국 최초의 목사. 3.1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9. 오세창 (천도교) :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10. 이종일 (천도교) :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1. 이종훈 (천도교) : 천도교 대표.

12. 박준승 (천도교) : 29세 때 천도교 입문.

13. 임예환 (천도교) :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14. 이승훈 (기독교) : 기독교측 수장이자 교육자.

15. 홍기조 (천도교) :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16. 홍병기 (천도교) : 천도교 대표

17, 최린 (천도교) : 천도교. 선언문 초안 작성. 1934년 중추원 참의,

18. 한용운 (불교) :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19. 백용성 (블교) :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20, 김창준 (기독교) : 기독교측 대표.

21. 박동완 (기독교) : 기독교측으로 3.1운동 경기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22. 신석구 (기독교) : 기독교 대표. 3.1 운동 후 '38년 신사 참배 거부.

23. 신홍식 (기독교) : 기독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

24. 양전백 (기독교) :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참여.

25. 오화영 (기독교) : 감리교 목사.

26. 이명룡 (기독교) : 기독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27. 이필주 (기독교) :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28. 최성모 (기독교) : 감리교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29, 이갑성 (기독교) : 기독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 근무. 31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30. 정춘수 (기독교) : 3.1 운동 당시 감리교 목사

31. 유여대 : 모사로 3.1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림

32. 김병조 :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임시정부 상임이사,

33. 박희도 : 33인 중 최연소자.

위에서 언급한 <민족대표> 서른세 분께 감사합니다.

 

8. 김마리아 선생에게 감사합니다.

일본의 옷 기모노에 <2.8 독립선언서>를 미농지에 복사해서 숨겨 고국으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마리아 선생에게 감사합니다.

 

9. 스코필드 박사에게 감사합니다.

1919년 일제의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 현장을 촬영해 국제적 반일 여론 조성

 

10. 방정환 선생께 감사 합니다.

1917년 비밀결사 청년 구락부 조직하고 1919년 독립신문 등사, 배포 중 체포되었습니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 조직하고,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고 1923년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색동회를 조직, 어린이날을 제정했습니다.

 

11. 이신애 선생께 감사합니다.

1919년 서울에서 만세운동 참가 / 1919년 강우규 의거 지원./ 대동단에 가입,/ 독립선언서에 여성대표로 서명 / 1919년 11월 종로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

 

 

12. 안경신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1919년 평양 만세운동 참가/ 1919년 대한애국부인회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 모금, 전달 / 1920년 광복군총영 결사대에 참가해 평남도청 등에 폭탄을 투척

 

 

13. 차경신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태평양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청년단 등 조직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비밀요원으로 활약 /미국으로 건너가 애국부인회 총단장 등 역임

 

14. 전명운 의사님께 감사합니다.

1906년경 공립협회 회원 /1908년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 처단 /1909년 동의회 회원, 대한인국민회 가입 /1930년대 동지회 가입, 민족의식 고취 활동

 

15. 문창범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광동학교 설립 운영 /전로한족회중앙총회 및 대한국민의회 회장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만세운동 전개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부 총장 및 상해 대한적십자사 고문 /연해주 한인들에게 우리들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음

러시아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러시아 지역에서 1919년 3월 17일 오전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니코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문창범은 특히 니코리스크 코르사코프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한글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전해달라는 요청서를 첨부하여 일본영사관에 전달하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관청과 11개국 영사관에도 선언서를 배부하였다.

독립선언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의 명의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선언서 끝부분에 “오인(吾人)은 2천만의 조선국민의 명(名)의 하에 그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 되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 모국(母國)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재보(財寶)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정부 당국자의 이름으로 독립을 요구하였습니다.

문창범은 3․1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측근인 원세훈을 상해에 파견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을 시도하였고, 양측의 합의에 따라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의 해산결의를 선언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도 교통총장에 취임하고자 상해에 갔으나, 상해 임시정부측이 해산치 않고 개조함에 머물렀기 때문에 입각을 거부하고 러시아령으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재건 정비하여 별도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16. 방순희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임정 선전부원 /1943년 임정 선전부원으로 한국어 방송 활동

 

17. 조지 애쉬모어 피치에게 감사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자신의 차 뒷자리에 부인과 김구를 부부로 위장해서 태우고 자신은 운전을 하여 김구를 피신시켰습니다. /194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임정승인을 위한 활동을 했습니다.

 

18. 이갑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대한독립단 총참모로 항일무장투쟁 전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 지방 행정조직인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으로 활동 /내몽고 포두에 배달농장, 배달소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기반 구축

 

19. 헐버트 목사에게 감사합니다.

대한의 독립을 세계에 역설한 파란눈의 후원자 /육영공원 교사로서 한국청년의 계몽에 기여 /《독립신문》창간 지원 및 “korea review" 창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지원했습니다.

 

20. 김규식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만주 왕청현에 설립한 사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의 승전 지휘 /고려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무장활동 전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를 맡아 활동했습니다.

 

21. 죠지 루이스 쇼에게 감사합니다.

중국 안동현 소재 선박회사인 <이륭양행>을 운영했습니다. 죠지 루이스 쇼는 영국 에이레 사람으로 당시 에이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을 동정하여 일본의 눈을 속이고 이륭양행에 임시정부의 교통사무국 설치토록 하여 통신연락, 군자금 모집 활동 지원했고 독립운동가들을 상하이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자신 소유의 증기선을 이용, 독립운동가의 무기, 출판물, 자금운송을 지원하다 일제에 체포, 내란죄로 기소(4월 옥고)를 치룬 이륭양행의 주인입니다.

 

 

22.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님께 감사합니다.

1931년 상해에서 김구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했습니다. 그 후 거사를 준비했고 1932년 일왕에게 수류탄 투척했습니다. 곧바로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김구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안중근 의사 동생 안공근의 집에 가서 수류탄을 들고 일왕을 처단하겠다고 맹서를 했습니다.

 

23. 윤봉길 의사님께 감사합니다.

1928년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농촌개혁 실시/ 1930년 중국으로 망명, 백범 김구선생을 만남 /1932년 4월 홍구공원서 폭탄 투척, 일제침략 원흉 처단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뼈가 있고 피가 있다면 조선의 투사가 되어라

 

 

24. 정정화 애국지사에게 감사합니다.

정정화는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중국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임정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무려 27년간이었습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선생은 1920년, 1921년, 1922년. 1924년, 1929년, 1931년까지 무려 여섯 번이나 목숨을 내놓고 감시가 심한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자금을 날랐습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노릇을 하며 한국애국부인회의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또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아울러 연합군 측으로부터 인계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25. 애국부인회에 감사합니다.

항일여성운동단체들로는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에 본부를 둔 대한애국부인회, 평남 순천의 대한국민회 부인향촌단, 강서의 국민향촌회, 평양의 결백단, 평남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단, 평남 개천의 여자복음회, 서울의 독립여자부 1919년 11월 감리교의 애국부인회와 장로교의 애국부인회가 서로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감리교의 애국부인회는 오신도, 손진실, 송죽회 지도자 안정석과 박현숙, 전도부인 김세지, 이성실, 최순덕 등에 의해 조직되었습니다.

 

26. 하란사 애국지사에게 감사합니다.

하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3ㆍ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습니다. 고종이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의에 파견할 밀사로 점 찍는 등 독립의 숨은 공로자였습니다.

구한말 평양에서 태어난 하란사(남편 성을 따름)는 일찌감치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스물한 살에 결혼한 뒤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기혼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자 외국인 교장을 찾아가 등잔불을 끄고 “내 인생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학문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설득해 기어이 입학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하란사는 귀국 후 여성이 주도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제자였던 유관순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뒤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27. 조마리아 애국지사에게 감사합니다.

안중근유족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에 본격 가담하면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습니다. 1924년 2월 안정근이 처자를 데리고 안창호를 따라 북경 근처 해전농장으로 이주하여 농장 개척을 통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함에 따라 조마리아는 안중근․안공근 가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28. 가흥에서 김구를 숨겨주고 보살펴 준 중국인 저보성에게 감사합니다.

상해의 항일구원회 회장 저보성(楮輔成)은 자신과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자신의 고향인 가흥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백범은 가흥에서 피신하는 동안 저보성 일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기며 피살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김구 피난처는 저보성의 양아들인 진동생의 집이었습니다. 집은 가흥의 운하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집 뒤에 항상 조그만 배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저보성의 장남 저봉장은 중국의 해군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한 후 귀국, 가흥과 항주에서 종이공장을 경영한 인물이었습니다.

1932년 여름, 가흥역에 일제 밀정들의 탐문이 시작되자 저보성은 백범의 안전을 위해 피신처를 며느리 주가예의 친정 별장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때 주가예는 하이힐을 신고 산 넘고 물 건너 백범을 직접 친정의 별장까지 안내했다고 합니다.

 

29. 김구와 함께 부부로 위장해서 김구를 무사하게 지켜준 주애보에게 감사합니다.

1933년 백범의 신분이 외부에 알려지자 저보성은 처녀 뱃사공인 주애보(朱愛寶)에게 이미 상처한 백범을 뒷바라지하게 했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당시의 생활에 대해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에서 잤다”고 기술했습니다. 백범은 1936년 주애보와 남경에서 헤어졌습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나에 대한 공로가 작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으로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때 백범이 주애보 여사에게 준 돈은 100원이었습니다.

 

30. 안공근 애국지사에게 감사합니다.

안중근의사의 막내동생으로 한인애국단을 관리하였던 안공근 지사에게 감사합니다.

 

31. 홍범도 장군에게 감사감사합니다.

1907년 함남 갑산 등지에서 의병활동 /1910년 러시아로 망명, 성명회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등 활동 /1920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 대승, 청산리전투 참가/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극장 수위를 하다가 75세를 일기로 사망한 홍범도 장군님 감사합니다.

 

32. 강우규 의사님께 감사합니다.

1910년대 만주에서 東光學校 등을 설립, 민족교육 실시/ 1919년 노인동맹단에 가입. 남대문역에서 조선총독 齋藤實 폭살 기도

 

33. 애국지사 이동휘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5년 군직을 사임하고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운동/ 1907년 신민회 지도자로 국권회복운동 전개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로 활약

 

34. 애국지사 이동녕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6년 만주 용정에 서선의숙 설립 /1911년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설립/ 1919-192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3차례 역임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27-1940년 임시정부 주석 4차례 역임

 

35. 애국지사 이회영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7년 신민회 조직/ 1911년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 1912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924년 재(在)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1932년 일경의 고문에 의해 순국

 

36. 애국지사 이시영 선생께 감사합니다.

1911년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 양성/ 1919년 임시정부 법무총장, 재무총장‘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33∼194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재무부장

 

37, 애국지사 신채호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7년 신민회 가입/ 1911년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주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작성 /1936년 10년 형을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

 

38. 부산의 일신여학교에 감사합니다.

39. 4.8 만세운동의 발원지였던 양동교회에게 감사합니다.

40. 만세운동을 지도한 정명여학교 김마르다 선생께 감사합니다.

유관순 열사를 배출한 이화학당에 감사합니다.

41. 정명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한 최자혜, 이금전, 김보현, 이은득, 강지성, 김영순, 김복점 학생에게 감사합니다.

42. 권기옥 지사에게 감사합니다.

한국인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은 여성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의 자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권기옥은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에 중국의 변방인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운남육군항공학교에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20대의 비행기에 2명의 프랑스 교관이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맹훈련을 하였습니다. 권기옥은 기초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끝낸 후 프랑스제 꼬드롱 쌍첩(雙葉) 훈련기를 처음 탔습니다. 여류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것이 한국 여학생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일본 관헌은 한국인 청년을 매수하여 암살을 지시했습니다. 이 사실을 권기옥은 이영무, 장지일 등과 함께 그 청년을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사살하였습니다. 그 후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길거리 어디서든 권기옥을 만나면 사살하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1925년 3월 권기옥은 운남육군항공학교의 제1기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43. 여자광복군 오강심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44. 여자광복군 오희영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45. 여자광보군 오희옥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46. 여자광복군 김병인,연미당, 조계림, 이국영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47. 여자광복군 지복영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48. 조선의용군 의열단에 단원들께 감사합니다.

49. 한인애국단에 감사합니다.

50,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51. 안창호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5년 공립협회 설립 계몽운동/ 1907년 신민회 설립 국권회복운동’1919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1923년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생명을 불어넣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전체대회에서는 선생을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 선출하고 상해파견을 결의하였습니다. 선생의 상해 행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축은 미주중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동하였습니다.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선생은 곧바로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습니다. 시정방침으로는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확보할 것과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그리고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선생은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하였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8월 이후에는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진행하였습니다

 

52. 파리장서의 주인공 김창숙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라. 유림이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 파리강화회의 제출, 우리 나라는 유교의 나라인데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선생은 치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스승이자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는 한편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곽종석, 김복한 및 선생 등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53. 애국지사 이범윤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8∼1909년 노령 연추에서 창의회조직, 의병투쟁, 13도의군 창의군 총재

1911년 노령 연해주의 권업회 총재 / 1919∼1922년 의군부, 대한독립군단 총재

 

54. 애국지사 김좌진 장군께 감사합니다.

1908∼1909년 노령 연추에서 창의회조직, 의병투쟁, 13도의군 창의군 총재

1911년 노령 연해주의 권업회 총재 /1919∼1922년 의군부, 대한독립군단 총재

 

55. 이강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04년 공립협회 창설 공립신보 주필로 활동

1907년 신민회에 참가하여 국권회복운동 전개

1909년 러시아 이주 해조신문, 최재형 선생의 대동공보사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안중근의사 의거 지원. 1919~1945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 임정에서 활동

 

56. 애국지사 노백린 장군께 감사합니다.

1904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장, 육군연성학교장 등 역임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비행사 양성소 설립

1923년 임시정부 국무총리·국무총장 역임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57. 임시정부 애국지사 조소앙 선생께 감사합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 발표

1919년 대한독립선언 발표, 임시정부 임시헌장 기초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임정의 지도이념으로 삼균주의 채택

1941년 삼균주의에 의거, 대한민국건국강령 기초

1919~1945년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외무부장, 임시의정원 의장 역임.

 

85, 임시정부 애국지사 차리석 선생께 감사합니다.

1921년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편집국장

1922년 시사책진회, 흥사단 원동위원부 참여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 역임

 

59. 임시정부 애국지사 조성환 선생께 감사합니다.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

1912년 이후 30년간 만주,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

1919년 임정수립 이후 27년간 계속 국무위원 등을 역임

 

60. 김종진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한족총연합회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투쟁 전개

중국 해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 운동기지 건설 주도

 

61. 김규면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1907년 신민회 가입

1919년 대한신민단 단장 및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

1921년 노령 우스리스크 지방에서 창해청년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동

1924년 임시정부 교통차장 및 교통총장대리에 선임, 상해에서 청년동맹회의 간부로 활동

 

62. 김치보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1908년 연해주 한민회 청년회 회장

1909년 미주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 회원

1910년 성명회 선언서 서명, 자선공제회 회장

1911년 권업회 통신부장, 한인신보 고문단장

1919년 대한노인동맹단 단장, 강우규 의사 거사 지원

 

63. 임시정부 송병조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64. 임시정부 조완구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65. 임시정부 홍진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66. 임시정부 엄항섭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67. 임시정부 청년공작대에 감사합니다

68, 임시정부 미국 전략사무국 OSS 본부에 감사합니다.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불렸던 한미연합작전. 이때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보내 정예요원으로 훈련시켰습니다.

69. 남자현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70. 여자광복군 이월봉 지사께 감사합니다.

71. 여자광복군 신정숙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72. 애국지사 김상옥 열사께 감사합니다.

73. 문창학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22년 대한군정서 김학섭 등과 신건원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경 사살 및 일제 기관 파괴이후 중국 훈춘 일대 일경 공격과 밀정처단 등 활동

1922년 일경에 체포되어 1923년 사형 순국

 

74. 연병호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19년 서울에서 청년외교단 조직, 정보통신 및 임정 지원

1929년 안창호?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 조직

1934년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 통합 신한독립당 조직

1935년 의열단을 통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으로 발전

1937년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 처단으로 징역 8년

 

75. 오면직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19년 3·1만세운동 참여, 1920년 진남포경찰서 투탄

1920년 조선ㆍ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 1921년 상해 망명

1922년 한국노병회 가입, 하남성 군관학교 입학

1930년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조직

1935년 맹혈단 조직, 단장으로 군자금모집, 밀정처단 활동

 

76. 최중호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11년 사내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9개월 옥고

1921년 한자신문 '사민보'의 편집 활동 전념

1924년 상해교민단 의원, 인성학교 교사, 1926년 교장

1926년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가, 군자금 모집 활동

1929년 재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 조직

 

77. 홍원식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군인으로 군대 해산 후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일본군에 대항

3.1운동 당시 발안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제암리 학살 만행으로 순국

 

78. 3,1 만세운동을 한 호수돈 여학교에 감사합니다.

79. 나운규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19년 함북 회령에서 3·1운동에 참가

이후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에서 독립군으로 활약

1921년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

1926년 10월 민족주의적 성향의 영화 '아리랑' 제작 개봉

 

80. 류인식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07년 안동 협동학교 설립

1911년 서간도 이주, 경학사 및 신흥강습소 설립 참여

1912년 국내로 귀국, 일제에 체포, 대동사 저술(~1920년경)

1923년 민립대학기성발기총회 중앙집행위원 및 물산장려운동 참여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장

 

81. 광복군 고운기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82. 광복군 장준하 애국지사께 감사드립니다.

83. 광복군 김우전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84. 광복군 김준엽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85. 광복군 나월환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193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 졸업

1937년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 체포, 송환 중 탈출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 서안에서 대장으로 활약

1940년 광복군 5지대로 편입되어 광복군 제5지대장 임명

 

86. 애국지사 이범석 장군님께 감사드립니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1920년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서 일군 대파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 및 韓籍軍官隊長

1940∼1945년 한국광복군 참모장, 제2지대장

 

87. 나중소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1919년 서일·김좌진 등과 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 조직

1920년 사관연성소 졸업생 등으로 구성된 교성대 대장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본 기병대 1개 부대 궤멸

1925년 3월 신민부 참모부위원장 겸 검사위원

 

88. 이상정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1936년 임시의정원 의원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지원

1941년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1942년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1944년 신한민주당 창당

1945년 중국 육군 유격대 훈련학교 교관(중국군 중장)

 

89. 오영선 애국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1914년 이동휘(장인)와 함께 만주 길림성에서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

1920년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1924년 임시정부 법무총장, 상해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

1927년 임시정부 외무부장, 1928년 임시정부 군무장

 

90.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비밀조직 <송죽결사대>에 감사합니다.

91. 천안 양대와 아산의 만세시위를 이끈 여교사들과 여학생들 감사합니다.

92. 배화학당의 학생 대표인 김정애, 김해라, 최은심에게 감사합니다.

93. <2.8 독립선언>을 한 동경유학생회에 감사합니다.

94. 현천문 애국지사께 감사합니다.

1919년 북로군정서 부총재

1920년 청산리 전투 참여

1926년 임시의정원 국무원으로 임명

 

95. 한시대 애국지사에게 감사합니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

1940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및 위원장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96. 송현주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하와이 지역 목사 출신,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고종 특사의 통역관으로 활동

미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에 자원 입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위원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유엔연합국회의에 임시정부대표단

 

97. 권업회에 감사합니다.

98.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 감사합니다.

99. 원심창 애국지사님께 감사합니다.

흑우회 가입 활동, 흑풍회 및 흑우연맹 조직

천진 일본영사관 일본군막사 폭파 계획

주중일본공사 처단 기도 중 체포되어 무기징역 선고

 

100. 임시정부 백범 김구선생께 감사합니다.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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