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사를 만난 순간

내가 만난 감사는 경남 하동군 북천면 가락골 7남매의 가장이자, 면장이셨던 아버지였다.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돌아오시면 매일 아들이 자는 방에 들러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아들을 건강하게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 이미 듣기 시작했던 단어가 ‘감사’였다. 초등학교 졸업생이 법전을 다 외우고 발음도 엉망이지만 결국 의령군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바탕은 ‘매일감사’였다.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감사의 삶’ 습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점점 멀어져 갔다. 여전히 아버지는 학비나 용돈을 주실 때는 반드시 하얀 봉투에 넣어서 “한 학기 잘 마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학기에도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감사 내용도 함께 적어서 주셨다.

경영컨설턴트로서 매일 다른 고객과 만나서 경영혁신을 지도하다 보니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며 생활하다보니 몸은 점점 말라갔고 현장 지도하러 가도 정신이 혼미해져서 제대로 지도할 수 없었다. 지도하는 고객에게서나온 ‘불만의 소리’가 회사 대표에게까지 전달되다보니 몇 번 불려가 지적을 받기도 했다. 아사 직전에 처한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정철화!  너 왜 이렇게 됐니?”라고 자책하며 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30대 후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고 피곤이 누적돼 바짝 마르고 새까맣게 변해버린 내가 보였다. 그 날 밤  꿈에 아버지께서 찾아오셨다. 

“그릇을 비워라. 새로운 복이 내려와도 넘쳐 버리는구나!” 

꿈에서 깨어난 나는 그날부터 매일 아침 화장실 변기에 앉아 ‘감사합니다’를 100번씩 쓰기 시작했다.  감사노트 열 권을 채우고서야 지도하는 회사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결 방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도하는 회사의 사장도 만족스러운지 우리 회사 대표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칭찬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마침내  최연소 임원이 되고 일본능률협회컨설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받게 되면서 컨설팅 업계에서는 일약 유명인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최근 내가 창안한 VM에 아버지의 매일감사와 감사나눔신문 김용환 대표와의 만남, 제갈정웅 이사장과의 협업으로 인해 TBVM으로 열매맺음에 감사합니다.
 

정철화 박사(VM창안자, 영성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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