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일 의학박사의 건강이야기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고 그 다음이 “아픔”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아픔의 고통인지도 모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아프지만 말았으면 좋겠다”라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나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마저도 통증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통증은 내 생명의 시작과 함께 할 정도로 오래된 것이고 나의 마지막 호흡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과 통증은 영원히 얽혀있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통증은 생명의 일부이다. 아니 생명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한 후 그에게서 갈비 하나를 떼 내어 이브를 만들었다. 그냥 떼 내면 아플까봐 깊은 잠에 들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첫 번째 마취의사이시기도 하다. 이것은 첫 번째 인간인 아담도 통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하였던 통증은 오늘날에도 계속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달나라나 화성에 이민을 가서 산다 하더라도 통증으로부터는 거기에서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예 통증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한 여인이 자신도 통증을 못 느끼는 무 통증 환자이지만 그녀의 7 자녀 중 4 명이 무통증 환자이고 그녀의 여동생과 조카 두 사람도 역시 무통증 환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찍 죽었다. 송곳으로 찔러도 아픈 줄 모르고 살이 곪아서 터져도 아픈 줄 모르고 피부가 불에 데어도 아픈 줄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을 부러워 할 이유는 없다. 통증은 “지금 몸의 일부가 손상되고 있으니 빨리 손을 써라” 하는 경고 신호인 것이다. 통증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중의 하나이다. 

우리 몸에는 5감이라 해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있는데. 이 다섯 가지 감각 모두 다 통각과 연결되어 있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아프고, 소리도 너무 크면 귀가 따갑고 아프며, 냄새도 너무 독하면 ‘코를 찌른다’라고 하며, 미각도 그 자극이 너무 강하면 혀가 아프며, 만지는 것도 너무 세게 누르면 아파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그 정도가 지나치면 결국 통증과 다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증이라고 하는 감각은 신비스러운 측면도 많이 지니고 있다.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가려운 감각도 없어지고 간지러운 감각도 없어진다. 우리 몸에 간지러운 감각이 왜 필요한지는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특히 이 간지러움이 통증과 형제간이라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말이다. 통증도 괴로운 감각이지만 간지러움도 괴로운 감각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죄인을 고문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사람을 꽁꽁 묶어 놓고 발바닥을 비롯해서 그 외 여러 예민한 부분을 마구 간질이는 형벌도 있었다고 한다. 정말 간지러워서 죽을 노릇이다. 의학적으로도 잘 설명이 안 되는 신기한 생리적 현상은 ‘간지러운 것’은 분명히 불쾌한 감각인데 간지럼을 타는 사람은 왜 깔깔대고 웃어야 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 통증과 간지러움과 가려움은 생리적으로 가까운 관계이니 지나치게 간지럼을 많이 타거나 심한 가려움증이 있는 사람은 진통제를 먹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환상통”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접할 때는 더욱더 통증에 대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실례를 든다면, 대퇴부(넓적다리) 부위를 절단한 환자의 대부분이 이미 잘려나가서 없어진 무릎이나 발이 아직 있는 것처럼 아주 생생한 감각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중 어떤 환자들은 있지도 않은 발가락이나 발목이 아파서 못 견디겠다고 한다. 그것도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발가락이 안으로 구부러진다든가 발목이 비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아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몸의 부위가 아프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통증을 환상통이라고 부른다. 아기를 낳는 산모가 느끼는 산통은 또 어떤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경사스럽고 기쁜 일인데 왜 그렇게 참기 힘든 고통스러운 통증을 경험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기분 좋게 깔깔거리면서 아기를 낳는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하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산모의 신진대사의 방향이 여기에 집중되어야 하고, 몸과 맘과 영이 여기에 집중되어야 하고, 온 몸의 기(氣)가 여기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통증이 산통인 것이며, 그러기에 이 산통은 “신성한 통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느끼는 “아픔”이라던가 “통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다. “아픔”이라는 것은 해부학적으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한의학에서 강조하는 원리 중의 하나가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다. 기(氣)가 통(通)하면 통증(痛症)이 안 생기고, 기가 안 통하면 통증이 생긴다는 뜻이다.

아픔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나의 어느 부분이 망가지고 있으니 거기에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신호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픔은 생명을 부여받은 나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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