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이 당부하고 간 감사와 사랑

 

육군 합동참모본부에서 합참의장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편무성 대령이 글 하나를 보내주셨습니다. 몇 해 전 초등학생이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며 겪었던 아픈 사연이었습니다. 편대령은 아들을 보내고 받은 조의금들을 아프리카의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 편 대령의 슬프지만 따뜻한 감사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에겐 대대장을 할 때부터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연대장을 하고 있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데 바로 용사들의 얼굴에 막내아들의 얼굴을 오버랩 시키는 것이다.
2012년 9월초 어느 날. 무더위에 지친 막내는 연신 야구공을 허공에 던져대고 있었다. 
“입단 테스트를 하려니 떨리니?” “똑바로 던져야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막내는 국가대표 야구선수가 꿈이었다. 그렇게 잘 던지던 녀석이 야구부 입단 테스트를 앞두고 긴장이 많았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 때는 그랬다. 막내는 아빠의 걱정과 달리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는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 즈음 나도 중령으로 진급했다. 막내는 아빠의 중령 진급보다 이사를 가지 않고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더욱 기뻐했다. 모든 것에 감사했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기쁨과 감사는 채 2주도 가지 못했다. 운동을 잘하는 녀석이 자꾸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먹은 음식물을 토하는 것을 보며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며칠 후 인근의 대학병원에서 MRI검사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부대 지휘통제실을 박차고 나왔다. “뇌종양입니다.”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위치가 좋지 않아서 조직검사도 어렵습니다.” 
의사는 내가 더 이상 물어볼 수 없도록 냉정했고 단호하게 말했다. 의사가 지워버린 내 머릿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 내 아들입니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마음과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아내와 막내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주저앉고 말았다. 
막내의 뇌종양으로 인해 마비되어 가는 것은 아들의 신경조직만이 아니었다. 나의 부대업무와 큰아들과 딸의 학교생활, 가정생활,가족 모두의 삶이 마비가 되었다.

그렇게 3개월여 동안 서울의 큰 대학병원에서 권위 있는 의료진으로부터 항암치료를 받았다.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온 막내는 발병 이전처럼 평온했다. 가족들의 마음을 아는지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대견스럽게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축제도 함께 했고, 온 가족이 여행도 갔다.
잠시이지만 예전처럼 모든 것이 평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학교에 갔던 아들은 병이 재발되어 하루 만에 등교를 접어야 했다. 
막내아들이 하늘나라로 가기 한 달 전 즈음, 언어신경이 살아 있어서 마지막으로 말을 할 수 있었던 2월 어느 날 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엄마와 형, 누나는 모두 자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던 막내아들이 소파에 앉은 채 말을 걸어왔다. “아빠는 대대장 언제 해?” 
나는 아들의 친구 녀석들이 자기 아버지가 대대장인 걸 자랑해서 막내아들도 아빠의 멋진 모습을 기대하나보다 생각했다. 
“12월이면 할 거야. 그때까지 건강해야 한다. 아빠가 멋진 모습 보여줄게”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막내아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 대대장하면 삼촌들 내 생각해서 잘해줘!” 
열 살도 안 된 막내아들이 죽음을 예견하며 전하는 말에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빨리 자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6개월이 하룻밤 꿈처럼 지난 이듬해 3월 24일. 벚꽃이 눈꽃처럼 휘날리던 그 날에 아들을 보내고 돌아오면서부터 대대장직을 준비하고, 마치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막내아들이 마지막 남긴 말은 머리와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아빠! 대대장하면 삼촌들에게 내 생각해서 잘해줘!’ 나는 용사들의 얼굴에 막내아들의 얼굴을 오버랩 시켜 보는 것으로 그 말을 실천하고 있다. 오버랩이 된 얼굴을 바라보면 사고를 치고 부대에 출근한 상근병도, 팔순의 할머니와 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용사도, 얌체 같이 이기적인 부하도 모두 내 아들이 된다. 그렇게 보고 있노라면 용서 못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다. 그저 내 부하이고 아들임에 감사하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나는 신앙인이다. 감사와 기도는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 감사와 기도가 실제가 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막내아들의 삶이 바뀌는 그 순간부터 감사하고 기도하는 삶은 내 삶의 구체적인 실제가 되었다. 

젊은 시절 정의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의롭게만 살면 두려울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는 상태가 제일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시절엔 내가 내린 “정의”란 테두리 안에서, 나만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며, 나만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했다. 진짜 강한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이상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내 나이 마흔 둘에 막내아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더 강한 것이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것을 알기까지 너무도 비싼 값을 치러야 했고 무엇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아파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아는 순간 나의 정의는 모두 무너졌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믿음에 변함은 없다. 아직 더 강한 것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제복을 벗고 삶을 다 살아내는 날까지 나는 감사하고 사랑할 것이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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