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반목을 넘어 하나되는 세상을 꿈꾸며

넬슨 만델라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 작은 감방에서 27년이나 썩게 한 백인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자신들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핍박해온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커다란 권력을 손에 움켜 쥔 채로.’‘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처럼 당연히 복수를 꿈꾸고 받은 만큼 갚아주려는 욕망이 꿈틀대야 이치에 맞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자신들의 세상이 왔노라 흥분한 흑인들에게 연민과 자제력과 관대함으로 백인들을 용서하자고 강변합니다. 이제 하찮은 복수보다는 백인들과 힘을 합쳐 나라를 다시 건설할 때라고 외칩니다.
그는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백인정부의 핍박에 맞서
1918년 템부(THEMBU)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고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백인정권은 흑인들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 요하네스버그 남쪽에 있는 샤프빌이란 마을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경찰이 총기를 난사해 69명이 사망하고 수 백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만델라는 절망하고 분노했으며 이를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국민의 창’이라는 비밀군대를 조직하고, 정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습득하였으며 에티오피아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집요한 당국의 추적에 결국은 체포되고 맙니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동료들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 받지만 여전히 자신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46살의 나이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 섬에 수감된 만델라의 진짜 단련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시련에 굴하지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만델라는 말합니다. “인간성에 대한 나의 신념이 혹독한 시련을 겪는 어두운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27년간의 수감생활
그는 낙관론자였습니다.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언젠가는 자유인이 되어 아프리카 대지를 두 발로 걷게 되리라는 낙관적인 사고를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채소밭을 일구고, 손바닥만 한 감방 안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 낙관적 사고로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감방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제자리 뛰기 45분, 손가락 집고 팔굽혀펴기 200회, 윗몸일으키기 100회 그리고 젊은 시절 배운 복싱연습을 매일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7년을 복역한 끝에 중년의 만델라는 1990년 2월 11일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어 결국 석방되었습니다. 인간성을 죽이기 위해 가두어 놓은 감옥에서 오히려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남아공의 현실은 여전히 암울했습니다. 백인정부는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흑백간의 갈등과 반목은 남아공을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만델라는 인종차별은 철폐되어야 마땅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국을 막기 위해 흑인 종족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한편 백인정부와 지난한 협상을 벌였습니다. 그를 통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도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민주적 선거제도의 정립을 관철시켰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남아공 최초로 흑인 참여가 가능하게 된 1994년 4월의 총선거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마침내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종결되고 350여년에 걸친 인종분규도 종식된 것입니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통치하에서 저질러졌던 흑인들에 대한 끝없는 탄압과 수많은 만행에 대한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이 권력을 움켜쥐게 된 남아공에선 이제 또 다른 피바람과 후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라 생각하며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지금까지 저질러졌던 백인들의 인권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면했습니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슬로건 아래 단 한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함께 손잡고 남아공의 위기를 해결해 가자고 촉구했습니다. 자신들을 핍박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며 함께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만델라의 행보에 대해 전 세계가 감동하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훗날 오프라 윈프리는 인터뷰에서 만델라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감옥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는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만델라의 그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자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뇌 끝에 나온 결단이었을 겁니다. 그의 크고 높은 정신에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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