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를 읽고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는 인간의 내면과 역사에 대한 커다란 통찰을 제공하는 책이다. 통찰은 ‘무엇을 볼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정답이 없다. 거꾸로도 보고 누워서도 보고 실눈을 뜨고도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며 좀 더 입체적인 조망이 가능해진다.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사피엔스’의 내용을 간략히 압축하여 소개해 본다.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준 유발 하라리에게 감사한다. <편집자 주> 

허구의 것을 믿는 능력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등을 누르고 영장으로서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첫째 원인은 언어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래나 원숭이 등 다른 동물들이 쓰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방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디테일한 언어를 가짐으로 인해 조직을 발달시키고 자신들의 영역과 능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허구의 것’을 믿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사피엔스만이 가진 독특하고 놀라운 힘의 원천이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피엔스들은 자신들의 종족 이외의 이방인들과도 서로 협력하는 유연한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독일의 슈타델에서는 ‘사자머리에 인간의 몸을 지닌’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구석기 시대인 3만2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때 벌써 인간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한다.

몸과 의식의 불일치
인간의 지능과 기술은 오랜 세월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 몸의 생리적 반응은 짐승에 가까웠던 수십만 년 전의 구석기 인류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각종 성인병을 유발하는 ‘비만이라는 질병’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몸에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토록 고칼로리 식품을 과도하게 탐하는 것일까?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의 사피엔스는 달콤한 과일과 같은 고칼로리식품을 접하는 일이 무척 드물었다. 영양에 대한 결핍과 공포가 일상이던 수렵채집 시절은 수만 년에서 수십만 년 동안 이어졌다. 잉여 생산이란 개념을 인간이 접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DNA는 물질의 풍요 속에 살면서도 여전히 수렵채집 시절부터 발달시켜온 지시에 충실하다. ‘고칼로리를 섭취할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잔뜩 먹어라!’ 몸과 의식의 불일치로 인해, 다이어트 상품 판매회사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 활황을 유지할 것이다.

농업혁명은 행복을 가져왔나?
약 1만 년 전에 이루어진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마침내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자연을 지배하고 곡식을 저장하며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고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그 이전의 수렵채집 경제와 비교하여 삶의 질이나 개인의 행복과 연결해 보면 이는 엄청난 허구이며 착각이다.
농업혁명 이전의 수렵채집 인류는 영양실조에 걸리지도 않았고 여가시간도 훨씬 많았다. 그들은 하루 3~4시간이면 충분히 먹거리를 얻을 수 있었고 한곳에서 식량 조달이 어려워지면 풍족한 땅으로 훌쩍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농경지 주변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전염병의 잦은 창궐이 뒤따랐으며 밀, 쌀, 감자 등 특정 곡물에의 의존도가 심화되어 기근이 닥쳐오면 속수무책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인간을 위한 혁명이라 할 수 있을까?
농업혁명으로 식량증산은 이루었으나 정착과 노동인력 공급의 필요에 따라 인구 증가가 폭발적으로 뒤따라 개인의 삶은 더 궁핍하고 여유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더 많은 증산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더 많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늘 쪼들리면서 더욱 더 많은 증산을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거듭된 것이다. 

지구적인 단위의 통합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으로 수백만, 수천만, 수억의 개체가 사회, 국가라는 이름아래 공동의 추구와 계획을 갖고 협업을 구축할 수 있었던 뿌리에는 허구의 것을 함께 믿고 따르는 상상력이 있었다. 또한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한 체제는 3가지다. 경제적 질서, 제국의 출현, 종교의 기능. 이 세 가지가 지구적인 단위까지도 통합을 가능하게 했고 이 통합은 갈수록 민족과 국가의 분파를 초월하며 점점 더 가속화 되어간다. 
로마 총독 데나리우스가 발행한 주화는 제국이 지배한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었으며 종교나 민족에 상관없이 열렬히 이 경제적인 유통화폐를 사랑하고 이용했다. 오늘날 이라크, 요르단 등의 나라에서 화폐의 단위로 사용하는 ‘디나르’는 바로 그 옛날 로마의 총독 데나리우스의 이름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슬람국가들이 기독교 국가의 황제 이름을 딴 화폐를 아직도 자국의 화폐단위로 쓰고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파이는 커질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부의 총량이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그만큼 가난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산업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였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은 이런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죄악시 되었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진보의 시대가 도래하며 ‘파이는 커질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새롭고 독창적인(당시로서는) 이론을 전개했다. “지주나 직공이나 구두공이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면 그는 남는 돈으로 조수를 더 많이 고용해 이윤을 더욱 늘리려 한다. 수익이 늘어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조수를 채용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의 수익증대는 공동체의 부와 번영을 늘리는 기초가 된다.” 부를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인식이 선으로 바뀌게 됨으로서 자본주의는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확고한 동력을 얻게 되었으며 이로써 세상은 물질만능의 새로운 풍조를 낳게 되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행복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행복은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 등의 외부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피엔스가 수백 만 년의 진화를 통해 지배받아온 생화학적 체제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행복에 대해 생물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관계맺음에 대해서도 새삼 숙고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의 행복을 조절하는 생화학 시스템은 사람마다 다르다.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작은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소한 일에서 크게 만족한다. 그런 사람은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매우 행복하다. 
반면에 우울한 생화학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비관하고 자책한다. 가진 게 많고 얻은 게 풍부해도 늘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타고난 생화학 시스템은 바꿀 수 없다. 그래도 후천적인 조절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 조절의 폭이 결코 클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친분을 나누고 사랑하는가의 문제는 나의 행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의 행복은 독불장군처럼 홀로 자라고 싹트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생화학 시스템을 가진 사람보다는 행복한 생화학 시스템을 가진 이들과 관계 맺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은 깊이 유념해 볼 문제이다.

 

소중한 글입니다.
"좋아요" 이모티콘 또는 1감사 댓글 달기
칭찬.지지.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저작권자 © 감사나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