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뉴스 / 감사장례식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들이 이어지던 날들... 이 땅의 사명보다 더 큰 하늘의 사명을 위해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데려야가야 하는 하늘의 마음인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후일을 부탁하며 떠나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인지.... 떠나보내지 못하는 땅과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인지...

서로 구슬피 울던 날...하늘이 울고 땅이 울었던 한 시대의 큰 리더였던 김용환 대표의 마지막 가는 길은 하늘도 땅도 사람도 대기마저 울었다.

고 김용환 대표는 여의도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4일간의 장례시간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서로 그간의 추억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돌아보며 깊은 교감을 나누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러나 김용환 대표는 쉬이 이 세상과의 이별을 하지 못했다. 아직 그가 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바로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그가 생활했던 곳, 소중한 가족이 있는 곳, 그는 가고 싶어했다. 유일한 안식처인 그의 공간인 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집으로.

찾아오는 문상객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에게 영혼의 말을 건네고 위로하느라 '아직 못다한 가족과의 나눔'.

인생의 반려자이자, 그의 일생동안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두 사람을 이어주는 소중한 아들과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했다. 

김용환 대표는 아들의 마음문을 두드렸고, 아들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하여, 화장장까지 함께 한 조문객들을 향해 사죄의 말을 올렸다.

"아버지를 이대로 보내기에는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사죄드립니다." 

아들은 장례식 내내 갑자기 곁을 떠나버린 아버지의 유언도 듣지 못했고, 갑작스런 상황속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떠나보내기가 내내 마음이 불편하여 사죄드린다."며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가는 시간을 더 갖기로 했다.

※고 김용환 대표의 유골함은 5일 후 경기도 파주 오산리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에 안치됐다.

 

■ 가족이 기억하는 '가장 김용환 대표'

아들 성중이가 기억하는 아버지
아들 성중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장례식 내내 아버지에 대한 부담감이 컸었다. 둘쨋날 잠시 홀로 있는 시간에 아들 성중이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아버지는 모든 일상이 드러나는 삶이셨습니다. 그래서 불편했습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사적인 관계보다 공적인 관계가 더 큰 영역이었던 아버지의 삶이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었다고 한다. 

아들 성중이가 다가가기에는 아버지는 너무 멀리 있었다. 왜냐하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어린 동생 이삭이, 그런 이삭이를 돌보셨던 할머니를 먼저 챙겼던 아버지의 삶. 그로 인해 성중이의 삶은 늘 기다림의 시간이었으리라.

아버지를 불편하게 여겼던 그가 남겨진 조문객들에게 나즈막히 한 말은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작은 거인이셨습니다."


아내 권용실 여사가 기억하는 남편
평소 남편의 대외적인 활동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아내이자, 든든한 조력자였던 부인 권용실 여사는 남편이 살아왔던 삶의 이유이자 사명이었던 '감사의 삶'에 대해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렇게 함께 해주신 것은 우리 가족에게 큰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장례식을 통해 저는 슬프기도 하지만 이번 장례식을 통해 보여주신 남편의 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마음으로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고요. 저도 저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면 이에 벗어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계속 기도 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남편의 장례식에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됐습니다. 10년 전에 감사... 감사 이야기를 들었는데 남편은 저에게는 공기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공기처럼 없으니까 더 귀하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남편은 언제나 저와 함께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라는 걸 이번 장례식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또한, "이제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또 사랑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남편이 하던 소명들이 계속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운데 이어져 가기를 원합니다. 저도 이전보다 더 많은 섬김과 기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하며...
전국적으로 호우경보속에서 산 사태와 길이 끊기고 사람들이 실종되는 슬픈 소식이 이어졌건만, 고인이 가시는 길에 함께 한 유가족, 동행하는 조문객들이 가고 오는 내내 아무 사고 없이 고인을 추모하는 가랑비만 간간히 내렸을 뿐이다. 그렇게 4일간의 장례는 끝났다. 감사한 일이다.

 

 

■ 발인예배

찬송 : 287장(예수앞에 나오면)
제목 :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설교 : 열방교회 문홍대 목사


평생토록 교회만 바라보고
교회이기를 바랐고
교회가 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김용환 장로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첫번째, 대학생 때는 가정교사 알바해서 가장 많은 십일조를 고향교회에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그헌금은 담임목사를 감동시켜 결국 교회건축을 무사히 마쳤다고 합니다.

두번째, 32년전 부산을 찾아와 교회를 세우려면 세우라고 권고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형님 만나세요. 그가 교회를 세울 겁니다." 결국 일면식도 없는 낯선 33살의 개척목사의  권유를 그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장로님 가정과 함께 열방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세번째, 하던 회사를 접고 3년간 풀리지 않았던 신문사 사업이었지만, 첫 수입 5000만원을 교회에 헌금하고 아내의 차를 바꿔주겠다는 돈을 아낌없이 교회에 헌신하고, 몸으로 헌금으로, 사랑으로 그렇게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네번째, 그당시 그의 하루 일과는
매일 밤 9시가 되면 아픈 아이(이삭)를 등에 업고 무릎을 꿇고 강단 앞에서 기도하고 집에 돌아가 퉁퉁 부은 어머니 손과 발을 마사지 하고 옆에서 쪼그리고 누워 잤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 체온을 느끼고 싶습니다."

아픈 아이였던 이삭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땐 밤새 아이를 업고 뛰면서 기도했습니다. 출근 때는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새벽별을 보며 영업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너무 피곤하여 졸다가 앞차를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낌없이 헌금하고, 아낌없이 나누고, 아낌없이 교회와 이웃과 회사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전심을 다하여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고 어머니에게 더없는 효자였습니다.

목회 중에 넘어가지 못할 산을 만날 때마다 "목사님 참고 인내하세요. 하나님이 목사님을 쓰시려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온 교회가 시험 받아 교회가 존폐위기에 걸릴때마다 그는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목사 편에서 말을 해서  철없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미움과 왕따를 받았는지 분양받은 교회를 잃고 노천에서 예배를 드릴때에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철없는 목사, 개념없는 어린 목사를 언제나 최고라고 자랑하며 다녔습니다. 언제나 엄마자랑! 아내자랑! 최고로 아들자랑! 언제나 교회자랑!

그를 보내고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토록 세우고 싶었던 교회! 이땅의 교회. 사실은 그가 교회였고, 그는 교회가 되었고, 그는 참으로 교회 자체였습니다. 

그는 목사인 내가 그토록 세우고자 했던 교회가 실은 바로 그, 김용환 장로였습니다. 그는 실로 나에게 형님같은 존재이었고, 그는 드디어 참 교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김용환 장로님!

그동안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교회와 가정과 회사를 내려놓고 이제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이삭이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영생복락면류관 영원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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